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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핑(Jeffing)'이라 불리는 '달리기-걷기-달리기' 주법으로 1970, 80년대 미국 마라톤 대중화를 선도한 러너 제프 갤러웨이가 별세했다. 1972년 뮌헨올림픽 육상 장거리 국가대표 출신인 그는 삶을 고양시켜주는 러닝의 마법을 최대한 많은 이와 공유하고자 저 주법을 개발했고, 80대까지 쉼 없이 달리며 시연해 보였다. 미국 최대 러닝 전문 온라인 매체인 'RUN'은 그를 "미국 러닝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평했다. jeffgalloway.com
1980년 1월, 미국 연중 마라톤 레이스의 시작을 알리는 텍사스 휴스턴 마라톤 대회에 바다이야기고래 35세 러너 제프 갤러웨이가 출전했다. 전성기를 넘긴 나이이긴 해도 그는 72년 뮌헨올림픽 육상 1만m 국가대표 출신으로, 73년 10마일(약 16km) 국내 신기록(47분 49초)을 세운 엘리트 러너였다. 초반 약 2마일(3.2km)을 경쾌하게 달리던 그가 갑자기 걷더니 약 15초 뒤 다시 달렸다. 1마일 간격 식수대가 보일 때마다 걸었다는 증언도 있다 게임릴사이트 . 마라톤이 갓 대중화하던 때여서 주로를 걷는 이들이 없진 않았지만 우승 후보군에 속하는 그가 그것도 초반부터 걷는다는 건 뭔가 잘못됐다는 신호였다. 마라톤에서 걷는 건 약하다는 증거, 자격 미달의 증거였다. 그렇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그렇게 걷고 뛰기를 반복하며 42.195km를 완주했고, 언론은 그의 후반 기록이 전반보다 빠른 ‘ 야마토연타 네거티브 스플릿(negative split)’의 전형을 보여줬다고 보도했다. 그 역시 약 30km 지점에서부터 카메라 줌렌즈가 풍경을 빨아당기듯 "바람처럼(zoomed by), 그것도 안정적으로 호흡하며 경쟁자들을 잇달아 추월했다"고 말했다. 그는 74년 호놀룰루 대회에서 거둔 자신의 우승 기록(2:23:02)보다 빠른 2시간 16분 35초로 3위를 차지했 바다신2다운로드 다.
그의 이름을 따 ‘제핑(Jeffing)’이라 불리는 런-워크-런 주법이 그렇게 마라톤 공식 무대에 처음 등장했고, 시민들은 마라톤을 걸으면서도, 그것도 꽤 잘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2000년대 말 등장해 지금도 큰 호응을 얻고 있는 ‘슬로조깅’에 앞서 1990년대 아마추어 마라토너 겸 작가 존 빙엄(John Bingham)의 뽀빠이릴게임 ‘펭귄 달리기(Penguin Running)’란 게 있었다. 그리고 그 전에 갤러웨이의 ‘제핑’이 있었다.마라톤 평원을 죽기 살기로 달려 끝내 숨졌다는 고대 아테네 병사 피디피데스(Phidippides 또는 Pheidippides)의 전설은 마라톤의 유래인 동시에 숙명적 정의(定義)였다. 그 비장함에 도전하듯 당당히 주로를 걸음으로써 마라톤의 정의를 다시 쓰고, 누구나 마라토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그가 별세했다. 향년 80세.
제프 갤러웨이(John Franks “Jeff” Galloway)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나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주로 성장했다. 해군 장교였던 아버지를 따라 이사 다니느라 중2(8학년) 때까지 14차례 전학을 다녀야 했고, 당연히 운동부에 들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고 한다. 조지아주 풋볼 대표 출신인 만능 스포츠맨 아버지가 그의 우상이었지만, 만 13세 무렵의 그는 운동스타는커녕 학급에서 가장 뚱보였다.
재학생 전원이 의무적으로 운동부에 들어야 한다는 교칙이 있던 7학년 시절 학교(Westminster School)에서 그는 오직 몸무게 때문에 풋볼팀 수비수로 발탁됐지만 자기 덩치의 반도 안 되는 상대팀 공격수에게 맥을 못 추다 쫓겨났고, 야구팀에선 평범한 플라이 볼조차 놓치곤 했다고 한다. 8학년이 된 그는 아버지의 권유와 “코치가 가장 너그럽다”는 평에 혹해 크로스컨트리 팀에 들었고, 또래들과 트랙과 숲길을 달리며 몸과 마음이 달라지고 삶이 고양되는 듯한 생경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4년 뒤 그는 조지아주 고교 육상 2마일 챔피언(9분48초)이 됐고 우등생으로 육상 명문인 코네티컷 웨슬리언대(역사학)에 진학했다. 70년대 보스턴 마라톤과 뉴욕시티마라톤을 주름잡게 되는 앰비 버풋(Amby Burfoot)과 빌 로저스(Bill Rodgers)가 당시 그의 팀 동료였다. 대학 졸업 후 해군 장교로서 베트남전 18개월 파병을 포함해 만 3년을 복무한 그는 플로리다대 대학원(사회학)에 진학했다. 당시 꿈은 교사였지만 육상에도 미련이 있었고, 플로리다 트랙클럽에는 당시 미국 장거리 기대주 프랭크 쇼터(Frank Shorter)와 잭 배첼러(Jack Bacheler) 등이 있었다.콜로라도 베일(Vail)고원에서 전지훈련까지 치른 셋은 72년 올림픽 대표팀에 나란히 선발됐다. 앞선 1만m 선발전에서 쇼터(1위)와 갤러웨이(2위)는 출전권을 획득했지만, 4위였던 배첼러는 다른 러너와의 접촉 페널티로 실격당했다. 1주일 뒤 열린 마라톤 대표 선발전. 배첼러의 페이스메이커를 자임한 갤러웨이는 결승선 막판 400m 직선 주로에서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춤으로써 나란히 달리던 배첼러(3위)에게 출전권을 양보했다. 친구와 '한 팀'으로 남기 위해 올림픽 마라톤 무대를 포기한 그 결단을 그는 “어떤 메달이나 기록, 트로피보다 더 큰 기쁨이었다"고 말했다.
1972년 올림픽 국가대표 시절의 제프 갤러웨이. 운동에는 젬병이던 '13세 뚱보 소년'이 미국에서 가장 빠른 장거리 육상 선수 중 한 명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그는 달리기의 마법을 직접 체험했다고 말했다. 그는 약 8년 뒤인 80년 휴스턴 마라톤 주로를 걸음으로써 마라톤의 정의를 다시 썼다. 가족사진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싫어하는 과체중 성인 및 아이들의 고통에 공감한다.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그랬던 13세 뚱보 소년이 14년 뒤 올림픽 국가대표가 되기까지 자신이 체험한 러닝의 마법을 세상에 알려, 누구든 기량껏 함께 달리자는 게 그의 러닝 철학이자 ‘제핑’ 철학이었다. 뮌헨 올림픽에서 쇼터는 미국 최초 마라톤 금메달(배첼러는 9위)을 차지했고, 갤러웨이는 오버트레이닝 후유증으로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올림픽 이후에도 갤러웨이는 73년 10마일 로드레이스 외에도 보스턴 마라톤 5위(2:21:27), 74년 호놀룰루 마라톤 우승 등 정상급 기량을 과시했다. 그렇다고 그가 스타였던 적은 없었다.
쇼터는 단연 스타였다. 그의 마라톤 금메달은 70년대 히피-자연주의 문화와 맞물리며 대대적인 러닝 붐을 촉발시켰다. 나이키사의 ‘와플 운동화’가 출시(1974년)된 것도, 과체중 체인스모커였던 작가 제임스 픽스(James F. Fixx)가 라이프스타일로서의 러닝을 예찬한 책 ‘달리기의 모든 것(The Complete Book of Running, 1977)’으로 뉴욕타임스 11주 연속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베를린-런던 마라톤 등 도시 마라톤이 잇달아 창설됐고, 아마추어들의 마라톤 참가도 활발해졌다. 뉴욕 센트럴파크를 4바퀴 도는 뉴욕시티마라톤 첫해(70년) 참가자는 127명이었지만, 79년엔 1만1,500명에 달했다.
갤러웨이는 1973년 플로리다주 탤러해시(Tallahassee)에 미국 최초 러닝 전문 매장 ‘피디피데스(Phidippides)’를 개업했다. 대형 프랜차이즈들에 밀려 2024년 모두 문을 닫았지만, 그의 매장은 80년대 전성기엔 40여 개 도시에서 성업하며 초창기 러너들의 아지트 겸 정보 교류의 장이었다. 그는 75년부터 아마추어 러닝 코칭 프로그램 ‘제프 갤러웨이 러닝 캠프’도 운영했다.
제핑은 그가 플로리다대 재학생 러닝 코치로 일하던 74년 시작됐다. 첫 수강생은 전원이 최소 5년 이상 제대로 달려본 적 없는 완전 초보였다. 부상 없이 안전하게 완주하는 데 목표를 둔 그는 누군가 헐떡이며 힘들어하면 무조건 걷게 하다가 호흡이 안정되면 다시 뛰게 했다. 그 반복 훈련 끝에 수강생 전원은 학기 말 5,000m와 1만m 구간을 “미소를 지으며” 완주해냈다. 그는 제핑을 통해 부상 위험과 후유증을 줄이고 자신감을 북돋울 수 있다는 걸 깨달았고, 연습과 경험을 축적하며 기량에 따라 달리기-걷기의 간격을 조율하는 '제핑 공식'까지 만들어냈다. 그 역시 말년까지 마라톤 총 236회를 완주하며, 78년 이후 단 한 번도 부상을 겪지 않았다.
인간도 별처럼 제 몸을 태워 에너지를 얻지만, 그 메커니즘은 훨씬 복잡하고 정교하다. 모든 에너지 대사는 체내 탄수화물과 지방을 ‘ATP(Adenosine Triphosphate)'라는 화학물질로 변환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에너지 화폐’라 불리는 ATP는 크게 3단계 시스템으로 만들어진다. 가장 먼저 근육 속 크레아틴 인산(PCr)을 ATP로 분해해 쓰는 것이다. 그 에너지는 로켓 엔진처럼 순간적인 폭발력을 발휘하지만 워낙 양이 적어 10초 이상 지속되기 힘들다. 인간의 몸은 예컨대 단거리를 전력 질주하거나 무거운 바벨을 단숨에 들어올릴 때 그 시스템에 의존한다. 나머지 두 시스템이 글리코겐(탄수화물)을 분해하는 무산소 시스템과 주로 지방을 산소로 태우는 유산소 시스템이다. 전자는 ATP 전환이 빨라 상대적으로 강한 추진력을 내지만 연료, 즉 근육 내 글리코겐 양이 한정적인 데다 부산물인 젖산을 배출해 근육 피로를 유발하기 때문에 장시간 의존할 순 없다. 산소를 이용해 지방을 태우는 후자는 연료가 거의 무한정하고 이산화탄소와 물 외의 부산물이 없어 피로도가 적은 대신 출력이 덜하다. 그래서 후자는 흔히 ‘장거리 엔진’에 비유된다. 지방은 탄수화물보다 에너지효율이 월등히 좋은 대신 더 많은 산소를 필요로 한다. 페이스 조절에 실패한 마라토너들이 레이스 중반 이후 겪곤 하는 ‘데드 포인트(dead point)’ 혹은 ‘벽(the wall)’이란 게 그런 상황, 즉 글리코겐이 고갈돼 지방만 태워 출력을 내느라 호흡이 급격히 가빠지고 다리가 무거워지는 상황이다. 에너지 대사 차원에서 보자면 마라톤은 글리코겐을 최대한 아껴 막판까지 적절히 활용하면서 지방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느냐의 싸움이다.
1970년 7월 4일, 참가자 150명으로 시작된 애틀랜타 '피치트리 로드레이스'는 근년엔 참가자 6만 명을 온라인 로또 추첨으로 선발하는 세계 최대 로드레이스이자, 성대한 독립기념일 시민축제의 장으로 성장했다. 저 대회를 대중화한 주역 역시 첫 대회 우승자였던 제프 갤러웨이와 애틀랜타 러닝클럽 회원들이었다. 참가자 대다수는 산보하듯 제핑으로 10km를 걷고 달린다. 위키피디아, 애틀랜타 러닝클럽 사진
저 생체의학적 지식들이 엘리트 스포츠에 접목되기 시작한 것도 70년대부터였다. 즉 마라톤도 체력과 투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언제 어떤 영양소를 얼마나 섭취하고 또 요령껏 소비해야 하는지 따지게 됐다는 의미다. 혈중 젖산 농도가 한계에 달해 근육 피로가 걷잡을 수 없어지는 ‘젖산 역치(Lactate Threshold)’에 신경을 쓰게 된 것도 대략 70년대 말부터였다. 73년 초보자 러닝클래스에서 시작해 76년부터 프로그램화한 갤러웨이의 제핑은 그러니까 과학(젖산 수치)이 아니라 경험과 관찰, 즉 러너들의 호흡과 근육의 떨림에 근거한 거였다. 젖산 역치에 도달하기 전에 근육을 쉬게 함으로써 젖산을 다시 에너지원으로 태우는 러닝, 글리코겐을 비축해 마지막 스퍼트에 쓸 수 있도록 하는 러닝. 그는 데이터가 아니라 사람을 보고, 경기 기록보다 하루하루의 변화에 주목한 러너이자 코치였다.
1970년 독립기념일(7월 4일), 애틀랜타 시어스(Sears)백화점 주차장에서 150명의 러너가 마라톤을 시작했다. 도심 피치트리(Peachtree) 거리 6.2마일(10km)을 달리는 경기. 그 대회가 근년에는 참가자 6만 명을 로또 추첨으로 선발하는 자타공인 세계 최대 규모의 '애틀랜타 피치트리 로드레이스'가 됐다. 참가자들은 성조기 의상 등 코스튬을 차려입고 출전하기도 하고, 시민 등 15만여 명은 또 거리에서 노래와 춤으로 그들을 응원한다. 대회가 끝나면 도심 '피드몬트(Piedmont) 공원'에서 또 성대한 잔치를 벌인다. 엘리트 러너들의 경쟁 무대를 시민 축제로 변모시킨 주역이 갤러웨이와 '피디피데스'의 단골들, 즉 애틀랜타 러닝클럽 회원들이었다. '오리지널 110'이라 불리는 첫회 대회 완주자 110명 중 선두(우승)가 갤러웨이였다. 그와 클럽 회원들은 78년엔 한 화장품 회사(Avon Corp.)를 설득해 세계 최초 여자 국제 마라톤대회(Avon International Women’s Marathon)를 개최하기도 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84년 LA올림픽에서 여자 마라톤을 정식 종목으로 채택했다. 갤러웨이는 북미 출판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클래식 러닝 매뉴얼인 ‘갤러웨이의 러닝북(Galloway’s Book on Running, 1984)’ 등 20여 권의 책을 썼고, ‘러너스 월드’ 등 여러 매체 칼럼니스트로도 활약했다.
1969년 초중등 통합사립학교인 애틀랜타 '갤러웨이 스쿨(The Galloway School)'을 설립, 교육자로 변신한 아버지 엘리엇(Elliott, 1920~2008)은 아들이 한창 달리던 70년대엔 풋볼 선수시절보다 30kg가량 몸이 불어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번엔 아들이, 팻보이 시절 자신이 그랬듯 심장 부정맥 등 여러 핑계를 대던 아버지를 설득했다. 조깅 첫날 전봇대 한 구간을 달리는 것도 버거워하던 아버지는 6개월 뒤 약 3마일을 달렸고, 1년 뒤 피치트리 로드레이스를 완주했다. 70대 아버지와 50대 아들은 96년 보스턴 마라톤대회에 함께 출전해 나란히 결승선을 통과했다. 둘의 기록은 5시간 59분 48초. 아버지는 “아들이 방해만 안 했으면 더 빨리 달렸을 것”이라고 지인들에게 자랑하곤 했고, 갤러웨이는 “나는 거기에 토를 달지 않았다”고 에세이에 썼다. 아버지는 숨질 때까지 총 50회 마라톤을 완주했다.
1996년 보스턴 마라톤 완주 직후의 70대 아버지 엘리엇(왼쪽)과 50대 아들 제프 갤러웨이. 인스타그램 gallowayschool
갤러웨이는 플로리다대 대학원 시절 트랙에서 만난 바버라(Barbara)와 76년 결혼, 2남을 낳고 해로했다. 바버라도 160회 마라톤 완주 기록을 보유한 러너다. 호놀룰루 마라톤은 그에겐 특별한 대회였다. 그가 우승한 유일한 대회인 데다 바버라에게 청혼한 곳도 거기였다. 무엇보다 완주 시간제한이 없는 대회였다. 베트남전 고엽제 후유증으로 심폐기능이 좋지 않던 그는 2021년 심정지로 수술을 받고 스텐트를 5개나 삽입해야 했지만 재활 끝에 체력을 회복했다. 하지만 2025년 호놀룰루 대회를 앞두고 무릎을 다쳐 출전을 포기해야 했다. '10초 달리기-30초 걷기' 제핑도 힘겨운 체력이었지만 그는 올해 12월 호놀룰루 대회에 재도전할 계획이었다. “전 구간을 걸어서라도 완주할 것”이라고 “여든 넘어서도 마라톤을 할 수 있고, 그것도 안전하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내 사명”이라고 말했다.
2019년 애틀랜타 'AJC 피치트리 로드레이스'에서 결승선을 향해 달리는 만 74세의 제프 갤러웨이. AP 연합뉴스
그가 출혈성 뇌졸중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 전역의 수많은 러너의 애도가 쇄도했다. 그의 책을 읽고 러닝을 시작해 새 삶을 살게 됐다는 유방암 생존자에서부터, 잇단 ‘벽’에 절망했다가 제핑 덕에 다시 달릴 수 있게 됐다는 저널리스트(Danielle Friedman) 등등.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그의 온라인 코칭 프로그램을 들으며 조깅을 시작했다는 55세의 한 여성(Lori Bierbrier)은 “갤러웨이의 마법은 친절과 인간미, 누구도 깔보지 않는 존중의 미덕이었다”고 말했고, 2011년 켄터키 머리(Murray) 하프 마라톤 경기 중 그를 만났다는 한 여성(Susan Williams)은 “엉덩이 쥐가 나서 고전하던 나를 추월한 그가 다시 되돌아와선 어떻게 그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지 친절히 조언해줬다. 정말 멋졌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올해 호놀룰루 대회에, 당연히 제핑 주법으로 그와 함께 참가할 예정이던 68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 버풋은 “누구나 자신을 믿고 자기 페이스에 맞춰 놀라운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이야말로 제프가 사람들에게 주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최대 러닝 관련 온라인 매거진인 ‘런(Run)’은 올림픽 메달리스트도 아니고 톱 레벨 국제대회 우승 경력도 없는 갤러웨이를 “미국 육상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일 것”이라 썼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1980년 1월, 미국 연중 마라톤 레이스의 시작을 알리는 텍사스 휴스턴 마라톤 대회에 바다이야기고래 35세 러너 제프 갤러웨이가 출전했다. 전성기를 넘긴 나이이긴 해도 그는 72년 뮌헨올림픽 육상 1만m 국가대표 출신으로, 73년 10마일(약 16km) 국내 신기록(47분 49초)을 세운 엘리트 러너였다. 초반 약 2마일(3.2km)을 경쾌하게 달리던 그가 갑자기 걷더니 약 15초 뒤 다시 달렸다. 1마일 간격 식수대가 보일 때마다 걸었다는 증언도 있다 게임릴사이트 . 마라톤이 갓 대중화하던 때여서 주로를 걷는 이들이 없진 않았지만 우승 후보군에 속하는 그가 그것도 초반부터 걷는다는 건 뭔가 잘못됐다는 신호였다. 마라톤에서 걷는 건 약하다는 증거, 자격 미달의 증거였다. 그렇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그렇게 걷고 뛰기를 반복하며 42.195km를 완주했고, 언론은 그의 후반 기록이 전반보다 빠른 ‘ 야마토연타 네거티브 스플릿(negative split)’의 전형을 보여줬다고 보도했다. 그 역시 약 30km 지점에서부터 카메라 줌렌즈가 풍경을 빨아당기듯 "바람처럼(zoomed by), 그것도 안정적으로 호흡하며 경쟁자들을 잇달아 추월했다"고 말했다. 그는 74년 호놀룰루 대회에서 거둔 자신의 우승 기록(2:23:02)보다 빠른 2시간 16분 35초로 3위를 차지했 바다신2다운로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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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갤러웨이(John Franks “Jeff” Galloway)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나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주로 성장했다. 해군 장교였던 아버지를 따라 이사 다니느라 중2(8학년) 때까지 14차례 전학을 다녀야 했고, 당연히 운동부에 들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고 한다. 조지아주 풋볼 대표 출신인 만능 스포츠맨 아버지가 그의 우상이었지만, 만 13세 무렵의 그는 운동스타는커녕 학급에서 가장 뚱보였다.
재학생 전원이 의무적으로 운동부에 들어야 한다는 교칙이 있던 7학년 시절 학교(Westminster School)에서 그는 오직 몸무게 때문에 풋볼팀 수비수로 발탁됐지만 자기 덩치의 반도 안 되는 상대팀 공격수에게 맥을 못 추다 쫓겨났고, 야구팀에선 평범한 플라이 볼조차 놓치곤 했다고 한다. 8학년이 된 그는 아버지의 권유와 “코치가 가장 너그럽다”는 평에 혹해 크로스컨트리 팀에 들었고, 또래들과 트랙과 숲길을 달리며 몸과 마음이 달라지고 삶이 고양되는 듯한 생경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4년 뒤 그는 조지아주 고교 육상 2마일 챔피언(9분48초)이 됐고 우등생으로 육상 명문인 코네티컷 웨슬리언대(역사학)에 진학했다. 70년대 보스턴 마라톤과 뉴욕시티마라톤을 주름잡게 되는 앰비 버풋(Amby Burfoot)과 빌 로저스(Bill Rodgers)가 당시 그의 팀 동료였다. 대학 졸업 후 해군 장교로서 베트남전 18개월 파병을 포함해 만 3년을 복무한 그는 플로리다대 대학원(사회학)에 진학했다. 당시 꿈은 교사였지만 육상에도 미련이 있었고, 플로리다 트랙클럽에는 당시 미국 장거리 기대주 프랭크 쇼터(Frank Shorter)와 잭 배첼러(Jack Bacheler) 등이 있었다.콜로라도 베일(Vail)고원에서 전지훈련까지 치른 셋은 72년 올림픽 대표팀에 나란히 선발됐다. 앞선 1만m 선발전에서 쇼터(1위)와 갤러웨이(2위)는 출전권을 획득했지만, 4위였던 배첼러는 다른 러너와의 접촉 페널티로 실격당했다. 1주일 뒤 열린 마라톤 대표 선발전. 배첼러의 페이스메이커를 자임한 갤러웨이는 결승선 막판 400m 직선 주로에서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춤으로써 나란히 달리던 배첼러(3위)에게 출전권을 양보했다. 친구와 '한 팀'으로 남기 위해 올림픽 마라톤 무대를 포기한 그 결단을 그는 “어떤 메달이나 기록, 트로피보다 더 큰 기쁨이었다"고 말했다.
1972년 올림픽 국가대표 시절의 제프 갤러웨이. 운동에는 젬병이던 '13세 뚱보 소년'이 미국에서 가장 빠른 장거리 육상 선수 중 한 명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그는 달리기의 마법을 직접 체험했다고 말했다. 그는 약 8년 뒤인 80년 휴스턴 마라톤 주로를 걸음으로써 마라톤의 정의를 다시 썼다. 가족사진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싫어하는 과체중 성인 및 아이들의 고통에 공감한다.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그랬던 13세 뚱보 소년이 14년 뒤 올림픽 국가대표가 되기까지 자신이 체험한 러닝의 마법을 세상에 알려, 누구든 기량껏 함께 달리자는 게 그의 러닝 철학이자 ‘제핑’ 철학이었다. 뮌헨 올림픽에서 쇼터는 미국 최초 마라톤 금메달(배첼러는 9위)을 차지했고, 갤러웨이는 오버트레이닝 후유증으로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올림픽 이후에도 갤러웨이는 73년 10마일 로드레이스 외에도 보스턴 마라톤 5위(2:21:27), 74년 호놀룰루 마라톤 우승 등 정상급 기량을 과시했다. 그렇다고 그가 스타였던 적은 없었다.
쇼터는 단연 스타였다. 그의 마라톤 금메달은 70년대 히피-자연주의 문화와 맞물리며 대대적인 러닝 붐을 촉발시켰다. 나이키사의 ‘와플 운동화’가 출시(1974년)된 것도, 과체중 체인스모커였던 작가 제임스 픽스(James F. Fixx)가 라이프스타일로서의 러닝을 예찬한 책 ‘달리기의 모든 것(The Complete Book of Running, 1977)’으로 뉴욕타임스 11주 연속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베를린-런던 마라톤 등 도시 마라톤이 잇달아 창설됐고, 아마추어들의 마라톤 참가도 활발해졌다. 뉴욕 센트럴파크를 4바퀴 도는 뉴욕시티마라톤 첫해(70년) 참가자는 127명이었지만, 79년엔 1만1,500명에 달했다.
갤러웨이는 1973년 플로리다주 탤러해시(Tallahassee)에 미국 최초 러닝 전문 매장 ‘피디피데스(Phidippides)’를 개업했다. 대형 프랜차이즈들에 밀려 2024년 모두 문을 닫았지만, 그의 매장은 80년대 전성기엔 40여 개 도시에서 성업하며 초창기 러너들의 아지트 겸 정보 교류의 장이었다. 그는 75년부터 아마추어 러닝 코칭 프로그램 ‘제프 갤러웨이 러닝 캠프’도 운영했다.
제핑은 그가 플로리다대 재학생 러닝 코치로 일하던 74년 시작됐다. 첫 수강생은 전원이 최소 5년 이상 제대로 달려본 적 없는 완전 초보였다. 부상 없이 안전하게 완주하는 데 목표를 둔 그는 누군가 헐떡이며 힘들어하면 무조건 걷게 하다가 호흡이 안정되면 다시 뛰게 했다. 그 반복 훈련 끝에 수강생 전원은 학기 말 5,000m와 1만m 구간을 “미소를 지으며” 완주해냈다. 그는 제핑을 통해 부상 위험과 후유증을 줄이고 자신감을 북돋울 수 있다는 걸 깨달았고, 연습과 경험을 축적하며 기량에 따라 달리기-걷기의 간격을 조율하는 '제핑 공식'까지 만들어냈다. 그 역시 말년까지 마라톤 총 236회를 완주하며, 78년 이후 단 한 번도 부상을 겪지 않았다.
인간도 별처럼 제 몸을 태워 에너지를 얻지만, 그 메커니즘은 훨씬 복잡하고 정교하다. 모든 에너지 대사는 체내 탄수화물과 지방을 ‘ATP(Adenosine Triphosphate)'라는 화학물질로 변환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에너지 화폐’라 불리는 ATP는 크게 3단계 시스템으로 만들어진다. 가장 먼저 근육 속 크레아틴 인산(PCr)을 ATP로 분해해 쓰는 것이다. 그 에너지는 로켓 엔진처럼 순간적인 폭발력을 발휘하지만 워낙 양이 적어 10초 이상 지속되기 힘들다. 인간의 몸은 예컨대 단거리를 전력 질주하거나 무거운 바벨을 단숨에 들어올릴 때 그 시스템에 의존한다. 나머지 두 시스템이 글리코겐(탄수화물)을 분해하는 무산소 시스템과 주로 지방을 산소로 태우는 유산소 시스템이다. 전자는 ATP 전환이 빨라 상대적으로 강한 추진력을 내지만 연료, 즉 근육 내 글리코겐 양이 한정적인 데다 부산물인 젖산을 배출해 근육 피로를 유발하기 때문에 장시간 의존할 순 없다. 산소를 이용해 지방을 태우는 후자는 연료가 거의 무한정하고 이산화탄소와 물 외의 부산물이 없어 피로도가 적은 대신 출력이 덜하다. 그래서 후자는 흔히 ‘장거리 엔진’에 비유된다. 지방은 탄수화물보다 에너지효율이 월등히 좋은 대신 더 많은 산소를 필요로 한다. 페이스 조절에 실패한 마라토너들이 레이스 중반 이후 겪곤 하는 ‘데드 포인트(dead point)’ 혹은 ‘벽(the wall)’이란 게 그런 상황, 즉 글리코겐이 고갈돼 지방만 태워 출력을 내느라 호흡이 급격히 가빠지고 다리가 무거워지는 상황이다. 에너지 대사 차원에서 보자면 마라톤은 글리코겐을 최대한 아껴 막판까지 적절히 활용하면서 지방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느냐의 싸움이다.
1970년 7월 4일, 참가자 150명으로 시작된 애틀랜타 '피치트리 로드레이스'는 근년엔 참가자 6만 명을 온라인 로또 추첨으로 선발하는 세계 최대 로드레이스이자, 성대한 독립기념일 시민축제의 장으로 성장했다. 저 대회를 대중화한 주역 역시 첫 대회 우승자였던 제프 갤러웨이와 애틀랜타 러닝클럽 회원들이었다. 참가자 대다수는 산보하듯 제핑으로 10km를 걷고 달린다. 위키피디아, 애틀랜타 러닝클럽 사진
저 생체의학적 지식들이 엘리트 스포츠에 접목되기 시작한 것도 70년대부터였다. 즉 마라톤도 체력과 투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언제 어떤 영양소를 얼마나 섭취하고 또 요령껏 소비해야 하는지 따지게 됐다는 의미다. 혈중 젖산 농도가 한계에 달해 근육 피로가 걷잡을 수 없어지는 ‘젖산 역치(Lactate Threshold)’에 신경을 쓰게 된 것도 대략 70년대 말부터였다. 73년 초보자 러닝클래스에서 시작해 76년부터 프로그램화한 갤러웨이의 제핑은 그러니까 과학(젖산 수치)이 아니라 경험과 관찰, 즉 러너들의 호흡과 근육의 떨림에 근거한 거였다. 젖산 역치에 도달하기 전에 근육을 쉬게 함으로써 젖산을 다시 에너지원으로 태우는 러닝, 글리코겐을 비축해 마지막 스퍼트에 쓸 수 있도록 하는 러닝. 그는 데이터가 아니라 사람을 보고, 경기 기록보다 하루하루의 변화에 주목한 러너이자 코치였다.
1970년 독립기념일(7월 4일), 애틀랜타 시어스(Sears)백화점 주차장에서 150명의 러너가 마라톤을 시작했다. 도심 피치트리(Peachtree) 거리 6.2마일(10km)을 달리는 경기. 그 대회가 근년에는 참가자 6만 명을 로또 추첨으로 선발하는 자타공인 세계 최대 규모의 '애틀랜타 피치트리 로드레이스'가 됐다. 참가자들은 성조기 의상 등 코스튬을 차려입고 출전하기도 하고, 시민 등 15만여 명은 또 거리에서 노래와 춤으로 그들을 응원한다. 대회가 끝나면 도심 '피드몬트(Piedmont) 공원'에서 또 성대한 잔치를 벌인다. 엘리트 러너들의 경쟁 무대를 시민 축제로 변모시킨 주역이 갤러웨이와 '피디피데스'의 단골들, 즉 애틀랜타 러닝클럽 회원들이었다. '오리지널 110'이라 불리는 첫회 대회 완주자 110명 중 선두(우승)가 갤러웨이였다. 그와 클럽 회원들은 78년엔 한 화장품 회사(Avon Corp.)를 설득해 세계 최초 여자 국제 마라톤대회(Avon International Women’s Marathon)를 개최하기도 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84년 LA올림픽에서 여자 마라톤을 정식 종목으로 채택했다. 갤러웨이는 북미 출판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클래식 러닝 매뉴얼인 ‘갤러웨이의 러닝북(Galloway’s Book on Running, 1984)’ 등 20여 권의 책을 썼고, ‘러너스 월드’ 등 여러 매체 칼럼니스트로도 활약했다.
1969년 초중등 통합사립학교인 애틀랜타 '갤러웨이 스쿨(The Galloway School)'을 설립, 교육자로 변신한 아버지 엘리엇(Elliott, 1920~2008)은 아들이 한창 달리던 70년대엔 풋볼 선수시절보다 30kg가량 몸이 불어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번엔 아들이, 팻보이 시절 자신이 그랬듯 심장 부정맥 등 여러 핑계를 대던 아버지를 설득했다. 조깅 첫날 전봇대 한 구간을 달리는 것도 버거워하던 아버지는 6개월 뒤 약 3마일을 달렸고, 1년 뒤 피치트리 로드레이스를 완주했다. 70대 아버지와 50대 아들은 96년 보스턴 마라톤대회에 함께 출전해 나란히 결승선을 통과했다. 둘의 기록은 5시간 59분 48초. 아버지는 “아들이 방해만 안 했으면 더 빨리 달렸을 것”이라고 지인들에게 자랑하곤 했고, 갤러웨이는 “나는 거기에 토를 달지 않았다”고 에세이에 썼다. 아버지는 숨질 때까지 총 50회 마라톤을 완주했다.
1996년 보스턴 마라톤 완주 직후의 70대 아버지 엘리엇(왼쪽)과 50대 아들 제프 갤러웨이. 인스타그램 gallowayschool
갤러웨이는 플로리다대 대학원 시절 트랙에서 만난 바버라(Barbara)와 76년 결혼, 2남을 낳고 해로했다. 바버라도 160회 마라톤 완주 기록을 보유한 러너다. 호놀룰루 마라톤은 그에겐 특별한 대회였다. 그가 우승한 유일한 대회인 데다 바버라에게 청혼한 곳도 거기였다. 무엇보다 완주 시간제한이 없는 대회였다. 베트남전 고엽제 후유증으로 심폐기능이 좋지 않던 그는 2021년 심정지로 수술을 받고 스텐트를 5개나 삽입해야 했지만 재활 끝에 체력을 회복했다. 하지만 2025년 호놀룰루 대회를 앞두고 무릎을 다쳐 출전을 포기해야 했다. '10초 달리기-30초 걷기' 제핑도 힘겨운 체력이었지만 그는 올해 12월 호놀룰루 대회에 재도전할 계획이었다. “전 구간을 걸어서라도 완주할 것”이라고 “여든 넘어서도 마라톤을 할 수 있고, 그것도 안전하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내 사명”이라고 말했다.
2019년 애틀랜타 'AJC 피치트리 로드레이스'에서 결승선을 향해 달리는 만 74세의 제프 갤러웨이. AP 연합뉴스
그가 출혈성 뇌졸중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 전역의 수많은 러너의 애도가 쇄도했다. 그의 책을 읽고 러닝을 시작해 새 삶을 살게 됐다는 유방암 생존자에서부터, 잇단 ‘벽’에 절망했다가 제핑 덕에 다시 달릴 수 있게 됐다는 저널리스트(Danielle Friedman) 등등.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그의 온라인 코칭 프로그램을 들으며 조깅을 시작했다는 55세의 한 여성(Lori Bierbrier)은 “갤러웨이의 마법은 친절과 인간미, 누구도 깔보지 않는 존중의 미덕이었다”고 말했고, 2011년 켄터키 머리(Murray) 하프 마라톤 경기 중 그를 만났다는 한 여성(Susan Williams)은 “엉덩이 쥐가 나서 고전하던 나를 추월한 그가 다시 되돌아와선 어떻게 그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지 친절히 조언해줬다. 정말 멋졌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올해 호놀룰루 대회에, 당연히 제핑 주법으로 그와 함께 참가할 예정이던 68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 버풋은 “누구나 자신을 믿고 자기 페이스에 맞춰 놀라운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이야말로 제프가 사람들에게 주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최대 러닝 관련 온라인 매거진인 ‘런(Run)’은 올림픽 메달리스트도 아니고 톱 레벨 국제대회 우승 경력도 없는 갤러웨이를 “미국 육상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일 것”이라 썼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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